“통째로 빌릴래.”

“오호, 드디어 결심했군?”

“어차피 썩어나는 돈, 이럴 때 아낌없이 부어야지.”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손님 하나가 나가자, 주점 안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이제 둘 뿐이었다.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치우며 마감을 준비하는 주인장과, 바 근처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잔을 기울이는 마지막 손님 하나. 문을 닫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일어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손님이 거슬릴 법도 하건만 주점 주인은 개의치 않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가족처럼 느껴지는 단골 손님이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운영해 온 주점에 주인이 두 번이 바뀌도록 꾸준히 매출을 보태주는 큰 손.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처음 봤던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술을 병째로 털어갔다. 이 주점이 가게 규모에 비해 술 저장고가 제법 큰 이유는 거의 저 사람 때문이었다. 든든하게 채워놓지 않으면 저 사람이 다녀간 직후엔 다음날 팔 술조차 남아나지 않았으므로.

“음, 슬슬 그만 마셔야겠다.”

그러므로 최근 그가 술을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은 주인장의 얼굴에 주름살을 더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다. 보라, 그는 지금도 겨우 와인 두 병을 비워놓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세계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발길이 뜸했을 때조차―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면서도―보드카로 다섯 병은 가볍게 마시고 가던 사람이었는데.

비에라치고도 제법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니 건강관리를 위해 줄이는 건가, 넌지시 물어봤을 때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수줍음. 그래, 그것은 분명 수줍음이었다. 그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망설임, 부끄러움, 그러나 그것을 덮으며 피어오르는 기쁨과 행복. 감정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채 보기 드문 서투름을 내보이며 그가 대답하기를,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이델린 맙소사. 이렇다 보니 농담 삼아 말려보지도 못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주점 주인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둘 모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심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점 주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 비워주면 되겠나?”

“2주 후 저녁쯤에. 구체적인 시간은 조만간 다시 알려주러 올게. 사람을 더 구해봐야 알거든.”

“어라, 두 사람분의 음식만 준비하면 될 줄 알았더니?”

“다섯 배 정도만 더 최선을 다해 준비해 봐. 돈은 오십 배로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