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망청妄言妄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멋대로 함부로 말할 테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들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부담 없이 접근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너무 무게 잡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제가 그런 인물도 아닌 데다, <장자> 역시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옛 글을 소개하고 강의하다 보면 고전에 높은 기대감을 품은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리라고 부를만한, 만고불변의 지혜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과연 정말 그런게 있을까. 오래도록 고전을 공부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낡아 아무 의미가 없는 내용이 있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오늘날 보기에 그저 신기하기만 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쓸모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혀를 끌끌 차며 옛사람을 비판할 수도 있고, 호기심 찬 눈으로 옛사람을 관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읽기란 현재적 의미를 발굴해내는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 삶을 낯설게 보고, 새로운 길을 더듬어 찾아가 보는 활동을 말합니다. 고전을 들춰보는 것은 여전히 오늘에도 유효한 어떤 태도를 찾아보고자 함입니다. 저마다 제 시대와의 갈등 가운데 남긴 글이,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말을 건네는 책이 고전입니다.

<장자>는 제법 쿨한 태도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리를 이야기하니 귀 기울여 들으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큰둥합니다. 듣거나 말거나 멋대로 하라는 식의. 열정 넘치는 선지자도, 친절한 선생도, 꼼꼼한 학자도 아닌 좀 다른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저 되는대로 한번 이야기해 보겠다 하네요.

이야기. 장자는 우화, 빗댄 이야기로 가득 찬 책입니다. 그는 다양한 존재를 앞세워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괴이한 짐승, 기묘한 나무, 비렁뱅이, 미치광이 등등. <장자> 속의 화자는 죄다 좀 이상합니다. 게다가 늘어놓는 말들이라고는 알쏭달쏭 알듯말듯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뿐입니다. 하여 그의 말을 두고 광언狂言, 정신 나간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장자의 말이 좋아 <장자>를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렇게 우리말로 글을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그것은 그의 진지하지 않은 태도가, 멋대로 이야기하니 멋대로 들어보라는 그런 태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늘 미끄러져 나가며, 쉽사리 도망쳐 버리는 그의 말이 갖는 기묘함이 좋았습니다. 어지러움과 아찔함, 뻔한 해석을 거부하는 불친절함이 좋았습니다.

2021년 <장자>를 강독하면서 조금씩 나눈 글을 모았습니다. 자구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우화라는 형식을 살리고자 대화체로 옮겼습니다. 우리말 흐름에 따라 일부러 표현을 바꾼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정확한 번역보다는 술술 읽히는 글이, 한번쯤 훑어볼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그렇게 과감하게 옮겼습니다. 망언망청, 장자의 말을 따라 멋대로 옮겼다는 식으로 둘러대봅니다.

<장자>를 강독하면서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철이 바뀌면, 해가 바뀌면 나아지겠지 하던 생각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입니다. 영원히 비상사태로 살아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는 정작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지 않을까요.

<장자>를 두고 길 없는 길을 가는 법을 일러주는 책이라 소개하곤 합니다. 길을 보여주는 책이 있습니다. 내 뒤를 따르라고 외치는 책이 있습니다. 함께 가자고 손을 잡는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다릅니다. 나도 너도, 그 누구도 길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길은 사람들이 나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떠나보는 것입니다. 다만 머물러 있지 말 것. 방향도 목적도 없이 나아가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우리 삶이 그러하듯.

주변분들에게 번역문을 나누기는 했으나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큰 욕심을 두지 않고 저지르는 일입니다. 하나의 실험이고, 시도입니다. 가 보아야 길을 만날 수 있듯, 해 보아야 그다음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는 법입니다.

    1. 옹달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