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이 글은 지난 2013년 서찬휘가 아내 헤니히 님의 생일 선물로 쓴 것으로, 헤니히 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천연 원석 테라피 주얼리 메이커 페르소나스톤(구 와이즈로터스)의 수호 성인인 힐데가르트 폰 빙엔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삶에 관하여

힐데가르트는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던 1098년 독일 남서부 알제이(Alzey) 지역 근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 베르머스하임(Bermersheim)에서 귀족 가문 힐데베르트(Hildebert)의 열째로 태어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힐데베르트 부부는 딸이 여덟 살 되던 해에 당시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erg)에서 은둔하고 있던 유타(Jutta)에게 맡기는데, 여기에는 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던 힐데가르트를 오래 살게 하려면 신의 뜻에 따라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에 따랐다는 설과 십일조 개념으로 열 번째 자식을 신에게 바친 것이란 설이 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 시기 20대 초반의 은둔 여성 수도자였던 유타에게서 가족과 떨어져 사는 공동체 생활은 물론 당시로서는 매우 고급 교육이라 할 수 있었던 라틴어 글 읽기와 쓰기, 성서 시편, 음악 등을 배웠습니다. 유타는 '슈폰하임의 메긴하르트(Meginhard von Sponheim)' 백작의 동생으로 그 스스로가 귀족 출신이었으며, 종교적 지식은 물론이고 다채로운 교양적 소양을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14~17세 되던 즈음 유타의 여성 신앙 공동체가 디지보덴베르크의 남성 수도원인 베네딕토 수도원의 부속 수녀회로 성장하고 유타가 그 장을 맡았으며, 힐데가르트도 베네딕토 수도원 소속의 정식 수녀가 됩니다.

힐데가르트가 비전을 기록 중인 자신을 그린 그림

힐데가르트가 비전을 기록 중인 자신을 그린 그림

이 시기부터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수녀회의 원장이 되던 마흔 두 살 무렵에 이르기까지 힐데가르트의 행적은 그다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환상을 끊임없이 본다는 힐데가르트가 남성 중심의 극단적 보수 성향이 팽배해 있던 당시 종교 조직 내에서 찍혀나갈 것을 염려한 유타의 가르침에 따라 조용히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136년 12월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수도회의 수녀들은 만장일치로 당시 38세였던 힐데가르트를 후임 원장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5년 뒤인 1141년, 42세 7개월이 되던 시점에 하늘의 계시를 받습니다. 내용은 네가 지금껏 보아온 환시와 이를 통해 느낀 것을 숨기지 말고 세상을 향해 쓰고 말하라는 것. 힐데가르트는 처음엔 이 계시를 거부하려 들었지만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마음 속 갈등과 정신적 피로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치면 마치 무병 같은 걸 테지요? 무엇보다도 여기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당시 사회는 수도회 안이 여성에겐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안전'이라는 것조차, 수도자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거할 때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수도자가 될 때 지켜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는 신, 그리고 상급자를 향한 절대적 복종(순명)입니다. 힐데가르트는 남성 수도자들이 중심인 베네딕토 수도회의 부속 수녀회 소속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수녀회란 수도원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아무리 수녀 사이의 장이었다고 하나 당시 10명 안팎이 모인 신앙 공동체 수준이었던 수녀회는 남성 수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수녀인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본 것을 '숨기지 않고 세상에 내놓겠다'는 결단을 내렸다는 건 그야말로 대단한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그 일이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인 이상, 이단으로 몰릴 가능성도 컸지요. 당시 수도원장 대리이자 힐데가르트의 고해 사제 역할을 맡고 있었던 폴마르(Volmar)는 힐데가르트의 고민과 번민에 "계시를 따르라"고 말해주고, 원고를 다듬는 역할까지 맡아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야 힐데가르트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시기부터 10년에 걸쳐 첫 책인 『쉬비아스(Scivias)』을 저술합니다. 이 때 저술을 도운 인물이 힐데가르트가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훗날 가장 아픈 이름이 되는 리햐르디스(Richardis)입니다.

『쉬비아스』는 3부 스물여섯 꼭지로 이루어진 책으로 집필 기간만큼이나 내용도 깁니다. 텍스트는 1만5천 자, 쪽 수로는 600여 쪽이나 되는 책입니다. 세밀화도 서른다섯 점이나 들어갔습니다. 책에는 신께서 자신에게 내린 환상과 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계시, 이른바 '비전'을 세상에 알리라 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창조와 타락에 관한 주제와 관련한 비전 여섯을 담은 첫째 장, 예수와 교회와 구원과 관련한 비전 일곱을 담은 둘째 장, 그리고 축성과 함께 찾아올 하느님 왕국과 함께 신과 악마 사이의 긴장 상태 증가에 관련한 비전 열셋을 담은 셋째 장이 배치돼 있습니다. 제목인 『쉬비아스』는 '신의 길을 알라'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문구 'Scito vias Domini'에서 따 온 표현입니다. 독일어로는 『길의 조명(Wisse die Wege)』이라 번역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후 1141년이 되던 해, 내가 마흔두 살 하고도 일곱 달이 더 지났을 때, 번개가 번쩍이면서 불덩이 같은 빛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것은 하나의 불꽃처럼 나의 뇌와 심장 그리고 가슴을 뚫고 흘러갔으나, 기진맥진하게 만들지 않고 태양이 제 빛을 퍼뜨려 한 사물을 따뜻하게 해 주듯 온화하게 불타올랐다"

이 책은 쓰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하더라도, 극단적 보수성향을 띠고 있던 당시 교계 입장에서는 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었기에 조심을 해야 했습니다. 『쉬비아스』를 책 형태로 처음 묶어낸 것이 1146년. 힐데가르트는 당시 교계에서 명망 높은 인사였던 끌레르보의 베른하르트(Bernhard von Clairvaux)에게 정중히 자신의 작업물을 평가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베른하르트는 프랑스 출신 신학자이자 힐데가르트가 『쉬비아스』를 낸 시점에 재위하고 있었던 교황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Ⅲ)의 스승이었고, 이론에만 기울기 십상인 스콜라주의 사조와 치열하게 논쟁을 거듭하며 변증법적 스콜라주의가 하느님의 신비를 땅에 떨어뜨리고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비록 2차 십자군 원정의 당위를 홍보하라는 교황 및 제후들의 명에 응했다 제대로 수습을 못하고 실패하긴 하였으나 그 시기 가장 영향력이 큰 성직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직접 여러 교황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고, 대립교황 등으로 말미암아 난장판이었던 당시 교계 분위기를 다잡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연히 여러 제후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겠지요. 하느님을 향한 완전하고 무한하며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사랑을 강조하여 훗날 교회 박사 칭호(1830)에 이어 '달콤한 꿀 같은 박사'라는 별명을 받았던(1953, 교황 피우스 12세) 베른하르트. 그는 다름 아닌 중세 말엽을 장식한 신비주의의 선구자였습니다.

신비주의란 절대적이자 궁극적인 대상과의 내면적 일치 체험을 추구하고 중시하는 철학 사조 또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사조의 선구자였던 베른하르트에게 하느님이 내린 비전을 기록했으니 검토해 달라는 힐데가르트의 편지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베른하르트는 힐데가르트에게 하늘의 뜻이라면 자신이 부연할 것이 없으니 받은 은총만큼 사랑과 겸손을 품으라는 취지로 답장을 보냅니다. 교황과 제후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는 큰 성직자 베른하르트의 인정은 곧 교계의 인정이다시피 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집필을 도왔던 폴마르의 보고를 받은 디지보덴베르크의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 쿠노(Cuno)는 마인츠(Mainz) 대주교였던 하인리히(Heinrich)에게 힐데가르트가 보는 비전과 관련한 심사를 요청하였고, 1147년 『쉬비아스』의 초판을 두고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른하르트가 배석한 시노드(synod, 가톨릭 교회 내 중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는 자문 회의)가 열립니다. 1차로 출판된 분량을 제출받아 심사하는 자리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힐데가르트가 본 비전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이로써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비전을 세상에 펼쳐 보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함은 물론, 교계와 세속 정치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1148년에 들어 힐데가르트는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독립해 수녀들이 스스로 직접 모든 일을 꾸려 나가는 수녀원을 세우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교계 분위기로는 수녀회란 남성 수도원에 부속한 것에 불과했고 수녀란 신부를 상급자로 모시고 복종해야 할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힐데가르트의 발상은 수녀가 남성 수도자들에게서 지위와 경제력 측면에서 완전히 독립함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 쿠노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이 장으로 있는 수도회 부속 수녀회 수녀가 명성을 얻자 이를 빌미로 귀족, 제후들에게 수많은 기부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돈줄이 휑하니 사라질 판이었거든요. 쿠노와 힐데가르트의 싸움은 2년에 걸쳐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다 애제자 리햐르디스의 어머니이자 힐데가르트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슈타데(Stade) 후작 부인과 마인츠의 대주교 하인리히가 중재를 하고서야 가까스로 수습되었습니다. 1150년,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을 이끌고 제2의 고향이다시피 했던 디지보덴베르크를 떠나 루페르츠베르크(Ruppertsberg)에 새로운 수녀원을 세우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