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아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마도 머신 러닝에 사용될 것으로 추측되는 사진들에서 특정한 이미지의 테두리 선을 표시하는 일, 속칭 누끼 따는 일이다. 사진 한 장당 30원에서 2백원의 돈을 받는데 부지런히 하면 아슬아슬하게 최저시급 정도의 효율이 나온다.

맨 처음 했던 일은 사진에서 골프선수와 채, 공을 분리하는 일이었고 오늘 한 일은 도로 사진에서 차선을 구분하는 일이다. 폴리곤 도구를 선택하고 차선의 테두리를 포함하도록 점을 찍어 차선의 누끼를 따면 그 차선이 흰색/노란색/파란색인지, 점선/직선인지, 한 줄/두 줄인지를 태그로 입력하면 사진이 평가자에게 넘어간다. 통과되면 2백원을 버는 것이다.

누끼를 따려면 셋 이상의 점을 찍어야 한다. 점이 셋 이상일 때부터 면적이 생긴다.

작업은 보통 여러 장의 연속적인 사진을 대상으로 삼는다. 아마도 영상을 찍어 프레임 단위로 나눈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되는데, 차선은 찍힌 각도나 빛의 양, 화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화질이 깨지는 대목에서 차선의 흰색은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깨지고(아이러니하게도 차선의 색 태그가 흰색/파란색/노란색이라 흰색 태그를 입력하면서도 좀 망설여졌다.) 네모 반듯했을 차선의 테두리는 다양한 종류의 다각형으로 잘려 나간다. 이건 말하자면 흰색이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드러나고, 사각형이 삼각형 혹은 오각형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두 개의 항 사이에서 어떤 포함관계(주로 후자가 전자에게 포함되는)를 성립시키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참아낸다. 사실 참아낸다기보다는 포함관계를 성립시키려고 해도 성립시키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내가 그 대상들을 단지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마우스 커서를 통해서 만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영상(혹은 빠른 속도로 연속적으로 찍힌 사진)이 찍힌 장소에 가본 적이 없으니(판교 근처로 추정된다.) 어쩌면 눈으로 본 적도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마우스 커서로 파란색이나 노란색으로 드러난 흰색/삼각형으로 드러난 사각형을 클릭해도=만져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파란색, 노란색이고 삼각형이다. 보는 것을 넘어 만져봤다는 (어쩌면 거짓) 경험이 나로 하여금 삼각형이 사각형의 일부라든지, 흰색의 본질이 파란색과 노란색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파란색-노란색이지만 흰색이고, 삼각형인 사각형이다. 이런 거짓말이 내가 건당 2백원짜리 사진 백장의 누끼를 따 2만원을 벌며 얻은 경험적 진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셋 이상이 모이면 면적이 생긴다. 누끼를 딸 때의 면적이 그림 위에서 특정 이미지가 속한 영역을 표시하는 면적이라면 「셋 이상이 모여」의 경우 그것은 책의 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연필이나 샤프로 밑줄을 쳐 가며 읽는 습관이 있다.(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는 이유 - 정확히는 빌려 읽었을 때 좋은 책은 전부 사서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밑줄을 그을 때의 단위는 일반적으로는 문장의 단위 - 마침표를 기준으로 삼는데 귀찮거나 밑줄 칠 영역이 많을 때에는 마침표를 신경쓰지 않고 그냥 죽죽 긋는다. 책에 따라 한 페이지에 밑줄을 치지 않은 문장보다 밑줄을 친 문장이 더 많을 때도 있고,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밑줄이 이어지기도 한다. 다음은 내가 「셋 이상이 모여」를 읽으며(아직 읽는 중이다.) 밑줄을 쳤던 문장 가운데 일부이다.

코엔 형제 영화의 매력은 어떤 소재로 영화를 찍든 어떤 서사의 극적 전개라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의 영화에서 사건은 사건처럼 보이기만 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결국 인생에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9)

모호성의 부족은 전체성의 부족이다. 모호함은 즉흥성에서 오지만 그 즉흥성은 정밀한 감각에서 온다. 브뉘엘의 영화는 우리의 인식체계에 던지는 폭탄이다. 던지면 폭발하는 건 폭탄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았던 세계다.(39)

보통 밑줄은 밑줄과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고 하면 그건 한 밑줄이 끝나는 점과 다음 밑줄이 시작하는 점이 만나는 경우이다. 많은 경우 이렇게 만난 밑줄들은 다시 읽을 때 한 맥락 안에서 읽힌다.

밑줄을 왜 치는 것일까? 대부분의 책을 읽을 때 나는 밑줄을 치지만 밑줄을 친 대부분의 책을 다시 읽지는 않는다. 그러니 많은 부분 밑줄치기는 나에게 다시-읽기의 영역보다는 읽기의 영역에 포함되고 그 영역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행동이다.

그러나 분명 밑줄을 다시 읽는 순간도 있다. 한번 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책을 일독하는 과정에서,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는 순간이다.(밑줄은 어떤 의미에서 책갈피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밑줄을 그었다는 것은 적어도 여기까지는 읽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재방문한 밑줄은, 특히 셋 이상의 문장에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에서 다시 만난 밑줄은 그 자체로 어떤 면적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셋 이상이 모여」 42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다음과 같이 밑줄을 쳤다.

영화는 언제나 삶을 배반한다. 스크린에서 좀 떨어져 앉을 걸 그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의 이미지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무신론자의 카메라는 언제나 형태 바깥을 본다. 형태만이 언제나 진지해 보여. 내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전부 꿈으로 변하고 있어.

보통 다시 읽는 밑줄, 다시 만난 밑줄은 "왜 여기에 밑줄을 쳤지?"라는 문장이 속한 면적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왜 이 여기에만 밑줄을 안 쳤지?"라는 문장이 쓰인 페이지를 만든다. 왜지? 저 대목을 읽을 때 저 문장만 마음에 안 들었나? 괜찮은 문장이고 주위 문장들이랑 연관성도 있는데? 왜 저기만 안 친거지? 도대체 왜…… 이쯤 되면 밑줄 쳐진 문장들에 둘러싸인, 혼자만 밍숭맹숭한 문장의 모습에 묘한 안타까움이나 연민까지 느껴 차라리 저 문장에도 밑줄을 쳐버려서 이런 답도 없고 의미가 있을리도 없는 번민과 추측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지지만 그럼에도 밑줄을 쳤던 순간의 생각의 흐름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은 채, 마치 그 순간에 함께 쳤던 것처럼 밑줄을 쳐버리는 것은 밑줄 원작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행위인 동시에 밑줄의 의도와 문장이 만나 만들어냈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새로운 의미적 가능성의 면적을 파괴하는 행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까지 나아가면, 그렇다. 책을 더 읽기는 그른 것이다.

이런 일을 겪어가며 나는 「셋 이상이 모여」를 49페이지까지 읽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책만큼 긴 연필로 길고 긴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자기 전에 드디어 셋 이상의 글이 모이는 -「계획시집」이 시작되는 84페이지까지 읽는 것이 오늘의 목표이다. 책을 읽다 말고 이런 글을 써버렸지만 아무튼 또 책을 읽고 읽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밑줄 그은 문장을 다시 읽어야지. 아마도 몇 번이고 '여기 밑줄을 왜 친 거야' 혹은 '왜 여기만 밑줄을 안 친거야'라고 의아해하고 또 의아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