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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악기 살해라는 기묘한 설정으로 출발한다. 최고의 악기에서 최고의 선율을 뽑아내는 압도적인 연주자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가 연주한 악기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는 악기가 되고 만다.그 압도적 연주자의 연주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그 다음의 연주자들의 연주가 시시해진게 아니냐고? 혹은 연주자가 악기에 문제를 일으킨게 아니냐고? 아니다. 면밀한 검토와 대조와 실험의 결과, 악기는 확실하게 살해된 것 처럼 보인다.

이렇게 악기를 살해하면서 최고의 감동을 주는 연주자, 호라이즌이 있다. 이 호라이즌이 당신이 소유한, 아주아주 비싼, 아주아주 좋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호라이즌이 이 악기를 연주하면 그 악기가 더 이상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당신은 이 악기를 가장 잘 연주 할 수 있는 사람이 호라이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의 손에서야말로 악기는 가장 가치있게 쓰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호라이즌에게 악기를 내어주겠는가, 아니면 그의 요청을 거절하겠는가?

소설의 도입부터 말미까지, 이 딜레마는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갈등의 소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의 의견들을 피력한다. 호라이즌에게 연주를 시켜야 한다는 호라이즌의 추종자군단, 호라이즌만큼은 아니지만, 그 악기로 오랫동안 충분히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으니 그 악기를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연주자들, 그 악기로 재태크를 하려는 투기꾼들... 그들은 나름대로 위대하고 타당한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의지를 관절시키려 노력한다. 위대한 이유들이 충돌하면 다툼이 되고 폭력이 생긴다. 그리고 기어이 살인이 일어난다.

판타지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들도 꿈을 꾼다.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야망, 별들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소망, 계급을 철폐하겠다는 이상 등등. 그 꿈들이 있었기에 인류는 진보했고, 눈앞의 이익에만 안달하는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그런데 그 꿈들은 종종 폭력을 야기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더 큰 뜻을 위한 작은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그런 희생은 숭고하다고, 너희들도 그 사람들처럼 희생하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그 희생을 치른 사람들은 과연 교과서 집필에 얼마나 참여했을까?

이영도의 많은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 즉 "숭고함을 앞세워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망치려는 자들에 대한 조롱"은 이 소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책의 도입부에는 위에서 서술한 딜레마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듯 보이지만, 결론은 그 딜레마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지평선은 넘을 수 없어. 보이긴 해도 닿을 순 없는 거라고. 그게 보인다는 이유로 정말 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말인가?""그렇게 생각했네""지평선을 넘기 위해선 도덕이고 윤리고선이고 다 필요 없단 말인가?""알면서 묻지 말게, 티르. 그건 지평선 이쪽에 있는 것들이야."

숭고함, 아름다움, 영원함, 새로운 지평. 다 좋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우선순위와 타인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다. 내 꿈을 위해 타인의 무엇인가를 희생시키는 순간, 나의 원대한 꿈은 우스운 농담이 된다.

『오버더 호라이즌』은 이영도 특유의 판타지 세계관과, 그 요소들을 활용한 탁월한 농담으로, 그 모든 숭고함들을 쉴새없이 조롱한다. 판타지 세계관에 익숙한 독자라면, 5분마다 쉴새없이 계속해서 피식거리는 골계미를 즐길 수 있는 단편들의 모음이다. 숭고함에 지쳐 가벼운 웃음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볍지만은 않게 권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