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

이 글은 저의 인상들과 생각들을 단순히 비유들로 전달하고, 공유해보고 싶어서 작성하는 글입니다.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철학이나 프로그래밍을 배운 것도 아니므로, 명확한 개념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단순한 주관적 지식들과 의식들을 주루룩 쓰는 것이니, 이 점 유의해주세요!

개요

저는 이번 학기에 ‘윤리학’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 철학 수업의 큰 특징 중 하나가 고전을 읽고 본인이 생각해보는 것인데요. 이 수업에서는 맨 처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강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의 저서인데, 최고 선(가장 좋은 것)으로서의 행복이 뭔지, 그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이 실천적인 방법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중용’입니다.

중용(中庸, mestoes)

중용을 잘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탁월성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탁월성’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인간)은 행복(최고 선)을 달성할 수 있는 씨앗을 갖고 있고, 이를 지향하는 ‘좋은 습관’들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는 실천적인 능력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유명한 구절에서 탁월성과 중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무 많이 할 수도 있고, 너무 적게 할 수도 있지만, 양자 모두에 있어서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2장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넘침과 모자람의 중간 즉, 산술적인 중간(1과 5 사이의 3)이 아니라 마땅히 그러해야하는 상황들에서의 마땅히 그렇게 하는, 제 생각에는 어쩌면 연속적인 것들 사이의 중간인 것 같습니다.

의문점과 내 생각

이 부분을 교수님께서 열심히 강독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뭐 이러면 중용이 여러 개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기보다는 그 상황에 마땅한 하나의 중용이 있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식이면 적어도 중용을 달성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겠구나..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주관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듯, ‘마땅히’의 명확한 기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아저씨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알 수 없음으로써 중용이라는 것이 추구하는 의미가 더 잘 발현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중용을 만족했다’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은 있을 수 없으므로, 계속 중용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게끔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든 생각

그러다가 문득, 정말 뜬금없게도 경사하강법과 42에서의 평가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망상을 잘하는 편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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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잘 모르지만, 대강 아는 경사하강법은 머신러닝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요, 그냥 제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로써만 전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지점을 정해놓고, 넘치면 줄이고, 모자라면 늘려서 최종 지점에 수렴하게끔 계속해서 학습시키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