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30분, 급하게 밀려들던 일이 얼추 마무리되는 시간입니다. 당장 급한 불은 꺼서 좋은데 덕분에 사그리 타 버린 내 에너지와 집중력, 점심도 책상 앞에서 이메일 확인하며 때우고 꽉꽉 채워 9시간 일했으니 퇴근해도 될 시간. 그렇지만 미뤄둔 일, 좀 더 파야 할 일은 아직 한 아름, 두세 시간은 더 일하고 싶은데 의욕이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님께 전화드릴 시간입니다. 늘 끝낸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저, 종종 자기 부정과 의심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하루를 보내지만 부모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어쨌든 잘 하는 사람이라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는 부모님 목소리를 들으면 지쳐 있던 온몸에 활력이 생깁니다. 덕분에 당초 계획대로 좀 더 일하고 끝내고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날도 별생각 없이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반가운 기색은 아주 조금, 무심한 듯 무뚝뚝한 어조로 인사를 건네실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죠.
"잘 지내지? 여긴 별일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아니나 다를까, 여느 때와 똑같은 인사 말씀. 그런데 아버지 목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배경 소음이 약간 다릅니다. 웅성웅성 그리고 희미한 전자음, 이런 소리만큼은 재빠르게 알아채는 저, 아버지께 여쭙습니다.
"아버지, 바깥이세요? 어디세요?
잠시 멈칫하시는 5초 사이, 아버지가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구나, 아니 숨길까 말까 고민 중이시구나 번뜩이는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어, 병원이야, 병원."
"아버지, 무슨 일로 병원에 가셨어요? 어디 편찮으세요?"
다시 찾아오는 5초의 정적.
"어, 별일 아니야. 그냥 병원에 정기검진 차 온 거야."
정말일까, 뭘 감추고 계신 거 아닐까 의심이 뭉게뭉게, 그렇다고 끈덕지게 여쭙고 찾아뵙고 확인할 길은 딱히 없습니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태평양 건너에서 일하는 저, 몇 년에 한번 찾아뵙는 게 고작이니까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별일 없으신 거라고, 꾸준히 정기검진하시니 건강하실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여 봅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라고 하지요. 이후에 우연찮게 동생과 통화하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동생이 입을 뗍니다.
"사실은 아버지 손가락 자르셨어."
"손가락? 무슨 소리야?"
"아버지 손가락에 염증이 생기셨는데 그냥 약국에서 산 약 바르고 병원을 안 가셨나 봐. 손가락이 퉁퉁 부어서 병원에 갔더니 너무 늦었다고, 당뇨 합병증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했대."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인지, 지난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심지어 어제와 그제 통화할 때도 별말씀 안 하셨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