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하단에서 스팀덱 유튜브 리뷰 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스팀덱. 국내에는 출시되지 않아 모두를 애타게 만든 휴대용 게임 콘솔. 엄청난 양의 주문이 몰린 탓도 있지만, 전 세계적인 공급망 이슈로 발송 지연까지 겹쳐 그 진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정식 루트로 구매가 불가능해 일부 국내 게이머들은 2차 판매자를 통해 1.5-2배에 달하는 프리미엄 가격을 지불하고 구매할 정도로 애가 타게 하는 녀석이다.

나 또한 임볼든 미국 지부를 통해 작년 7월 사전 예약 오픈과 동시에 신청을 했지만, 부지런한 경쟁자들 덕에 1년이 넘어서야 받아보게 되었다. 게임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신작이 나오면 대부분 플레이해보고 게임 업계 관련 소식은 빠지지 않고 팔로우업할 만큼 나름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도 지난 1년은 이역만리로 떠난 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애타는 시간이었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한창 즐기고 있던 <갓 오브 워> 크레토스가 출근길 버스에서, 회사에서, 카페에서 적들을 도륙하고 있다니. 탄성만 터져 나왔다. 업그레이드 시점을 몇 년이나 놓친 나의 고물 컴퓨터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연신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2주 후 스팀덱을 내려놓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팀덱? 감히 ‘그다지’라고 말할 용기

이미 이 글을 클릭했다면, 스팀덱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게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기기이다. 세계 최대의 게임 플랫폼 스팀의 게임을 휴대용 콘솔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제조사 밸브가 지금껏 내놓은 게이밍 기어들은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스팀 덱만큼은 출시 전후 모두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플레이스테이션 4에 버금가는 훌륭한 사양도 사양지만(자세한 사양은 이 링크에서 확인할 것), 무엇보다 사람들이 스팀덱에 열광하는 것은 개방성일 것이다. 사실 요즘의 PC 게임은 그냥 스팀 게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에픽게임즈가 분전하고 있지만, 스팀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이다. 에픽게임즈 독점작이 나와도 6개월에서 1년을 기다렸다가 스팀 출시 이후 구매하는 것이 요즘의 게이머들이다.

물론 기존 UMPC들에서도 PC 게임을 돌릴 수 있지만, 스팀(a.k.a PC 게임)의 공식 UMPC라는 데서 오는 신뢰성은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독점 게임과 세컨드 파티 위주의 닌텐도 스위치와 달리 높은 개방성을 가졌다는 스팀덱의 특징은 스팀덱을 휴대용 게임 콘솔의 왕좌로 단번에 올려놓을 만한 충분한 근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전의 히트작에 감히 ‘그다지’라는 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나처럼 테크 덕후나 헤비 유저 수준까지는 아닌, 정말 캐주얼한 취미로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스팀덱의 심적 감가상각 폭은 매우 빠를 것이다. 스팀덱 자체가 별로라는 얘기가 아니다. 성능, 조작감, 휴대성, 배터리, 가격 등 종합적인 측면을 고려해봤을 때, 과거로 돌아간다면 전과 같이 쉽사리 구매 버튼을 클릭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성품 & 디자인

내가 구매한 모델은 256GB, 가격은 529달러로 약 70만 원 정도이다. 구성품 측면에서의 원가절감은 요즘 테크계의 추세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찬성이다. ‘스끼다시’를 포기하더라도 회를 더 많이 먹자는 주의인 나로서는, 본식만 훌륭하면 그만이다. 물론 가격은 그만큼 싸야 한다. 스펙을 고려하면 스팀덱은 이러한 조건에 합격이다.

휴대용 케이스, 스팀덱 본체, 충전기가 끝이다. 박스에는 무려 ‘할머니 댁에서’, ‘대관람차에서’라는 한글 글귀가 쓰여 있어 괜스레 사람 설레게 한다. 한국 정발도 안 해줄 거면서. 이걸 보고 괜한 기대는 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불만이 있다면, 충전기가 110V라 변환 어댑터를 사느냐 추가 지출한 1,000원 정도.

예쁜 디자인도 필요 없다. 허례허식이다. 이쁘면 뭐 하나. 근데 사실 좀 크고 못생기긴 했다. 좌우로 30cm, 웬만한 성인 남성 팔뚝만한 크기에 무게도 669g이나 나간다. 다만 손에 잡는 느낌은 괜찮다. 플라스틱 마감에서 ‘싸구려’ 느낌은 전혀 나지 않고, 버튼들도 본체에 탄탄하게 결합되어 있다. 스틱의 촉감이나 감도는 개인적으로 스위치에 비해 곱절로 좋다. 마우스, 방향키를 대신해 사용할 수 있는 매트한 재질의 트랙패드의 촉감도 만족스럽고, 특히 햅틱 반응으로 느껴지는 진동은 뭐랄까. 드러내 놓고 과시하는 섹시함이라기보다는, 은근하게 야한 느낌이다.

조작감

의례적으로라면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지만, 조작감을 가장 먼저 말할 수밖에 없다. 불편하다. 크기, 무게, 그립감, 키 배열 모두 불만이다. 사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다. 그리고 이 정도 크기의 기기에 더 이상 최적의 키 배열이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편한 건 사실이다.

물론 적응은 된다. 적응 못할 게 어디 있겠는가. 군대도 적응하고 육아도 적응하는데. 그런데 결코 ‘절대적인’ 기준에서 편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며칠 쓰다 보니 손에 익어 괜찮았다. 그러다가 PC에서 엑스박스로 게임을 해보고, 다시 스팀덱을 사용하니 또 툴툴거리게 된다.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엑스박스 패드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나름 신체 구조를 분석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물론 나는 문과라 이런 분석이 허망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게임을 하다 보면 방향키를 눌러야 할 경우가 많다. 이때 보통 왼쪽 엄지손가락을 사용해야 하는데, 패드로 게임을 할 때 왼쪽 엄지손가락은 대부분 왼쪽 스틱에 놓여있게 된다. 자, 한번 따라 해보자. 스틱 위에 놓여있던 왼쪽 엄지손가락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움직여보자. 무엇이 더 편한가?

나의 경우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가동범위가 최소 2배는 넓었고, 움직임도 더 자연스러웠다. 엑스박스 패드 기준 양쪽 스틱 안쪽으로 위치한 셀렉트 버튼과 스타트 버튼도 스팀덱에서는 스틱 위쪽에 있어 빠른 접근이 어려웠다. 나의 조작감에 대한 불만은 대체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특히, 3인칭 액션 RPG를 즐기는 나에게 방향키를 순발력 있게 누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이게 엑스박스 패드보다 몇 곱절은 불편했다.

물론, 듀얼쇼크를 비롯해 스팀덱과 유사한 키 배열을 가진 컨트롤러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내용이다. 하지만, PC 게임 컨트롤러 중 엑스박스 패드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고, 닌텐도 스위치도 비슷한 키 배열을 가지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나와 같은 불만을 가진 이들이 적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조금 궁색하지만, 방향키가 스틱 바깥쪽에 있는 듀얼쇼크의 경우 스팀덱과 같이 아예 스틱 정좌 방향이 아니라, 좌상단에 위치에 이보다는 좀 더 편하게 느껴진다.

또한, 기대했던 트랙패드도 활용도가 떨어졌다. 왼쪽 트랙패드는 방향키 대신 이용할 수 있지만, 크기가 생각보다 크고 입력되는 부위도 직관적이지 않아 손길이 뜸해지게 되었다. 오른쪽 FPS 게임 등 에이밍이 필요 한 게임에서 마우스 대신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키마(키보드+마우스)의 조작감을 기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스틱으로 에이밍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