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조직화(Self-Organized)에 대한 논의에서, "그것이 창의적인 기업가 논리를 빌린 근거지 기반의 계획과 잘못된 방식으로 빈번하게 동일시"되는데, "창업이나 자기계발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것은 무슨 뜻일까? 느닷없지만 근래 들었던 김용익 작가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김용익 작가는 한국에서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를 체화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듯하다.
저는 제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이 인생의 행로에서 “미술가”라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공인된 직업을 선택하였지만, 그 제도 안에서의 “미술가라는 공인된 지위”를 이용하여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발언자”이기를 원합니다.(제도 그 자체를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저는 결코 래디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가 생산하는 “작품”을 홀대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는 또 좀 래디칼하지요.) [출처] 경기창작센터 여름 아카데미 대담(구나연 김용익)|작성자 얼개
'체화'는 그 논리를 암기하여 이용하는 것, 특정 커뮤니티 내부의 규칙을 눈치 빠르게 파악하여 보여준다는 것 이상이 거기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말하는 미술> 팟캐스트에서 말하기를, 담당 교수였던 박서보가 학생들에게 폭언에 가까운 크리틱을 할 때, 당시 몇 안되는 이론서를 보고 대강을 파악했던 김용익은 "그래? 이런 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 그게 얼마나 인정 받기 쉬운건지 보여줄게"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 졸업식 때 졸도하는 포퍼먼스 같은 이야기...도 들으면서 그때는 참 순수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규칙 따르기의 관습이 달라졌을까? 그저 더 세련된 형태로, 더욱 객체화된 형태로 남아있다. 가령 24시간+a 동안 영상을 트는 전시가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는 서울에서 화제가 된 전시가 지방에서 반복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혹은 조영일이 특정 소설가를 지칭하며, 남한의 좁은 문학사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형식 실험에 불과하다고 일축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만약 이것을 양식화라고 하면, 우리는 양식화 바깥을 상상할 수가 없으며, 사후적으로(그리고 곧장) 그것이 양식화되고 객체화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종종 작가들은 자신을 플레이어로 정체성화하며, 자신이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안규철).
반면 우리의 행동에 양식화(의미의 선험적 틀)이 부여되는 것은 매우 중요할 수 있다. 개체는 그 내부에서 그것을 만족시키는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양식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훌륭한 양식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명시적으로 규칙을 정해 주기보다 규칙을 만들어 나가게 함으로써 개체에게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양식화 위에서(혹은 속에서, 어떤 도식적 상상이 필요할까?) 개체가 갖는 의식은 양식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혹은 양식화 내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자의식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식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관의 충동이 필요하다. 양식화 자체는 그 주관의 충동을 객체화하고, 그 충동을 차례대로 지워나간다. 이 단계에 머물러 양식과 하나가 될 때, 우리의 활동은 그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객체의 우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한다는 면에서, 주체의 충동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동일시 된다. 그때 개체(고유명으로 호명되는 누구누구들)는 객체의 수행자'로만' 존재한다.
저자들은 "자기-조직화"는 "활동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어문에서 삭제된 중동태의 상태, 과정 자체에 '내가' 존재하는 상태(이 상태에는 지금 우리가 능동/수동이라 일컫는 상태가 모두 공존한다(*고쿠분 고이치로))에서만이 자기를 조직화한다는 말이 가능할까?
가령 어느 작가의 약력을, 어디 단체전 몇 번 하고 레지던시 들어가고 상 받고 책 내고 등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혹은 매우 자율적으로 보이는 어떤 독립 큐레이터의 활동들이 차곡차곡 이력으로 모여 어느 재단의 큐레이터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양식화라는 레이어 위에 어떻게 고유성의 레이어를 확보할 지는 규칙을 갱신하는 놀이와 다른 영역이다. 즉 객체화된 충동은 다시금 객체화를 거부하는(정확히는 다른 객체화를 요구하는) 충동으로 전환될 수 있다. 개체는 객체(집단규칙의 결과물)과 주체(사적규칙의 담보자) 사이가 맞닿는 인터페이스(Inter-face)다.
그러니까 김용익 작가에게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그 논리의 실체성을 '진짜로' 믿는다는 데 있다. 그 믿음은 다른 블로그 포스팅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 없는 아들"이라는 모순을 가능하게 만든다. 미술과 거의 무관한 인생을 살다 사상가로서 변모한 그린버그에 대한 흥미로운 후대의 평가는, 그가 당시의 미술 이론 전반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그의 무지가 오히려 그 이론을 극한까지 밀고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관성의 측면에서, 이는 촛불을 들고 이 복도 끝까지 가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실제로 그 촛불을 들고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걸어갈 때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할까? 거대한 규모의 주관적 환상은 그 자체로 객체화된다(그렇다면 사회적 장의 규칙 놀이는 한편 주관성의 매개가 아닌가? 이 과정이 끝없이 운동한다). 오히려 그 복도에 대하여 말해야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