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일요일, 12시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간다. 출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휴가로 가는 것도 아니다. 백수가 되었다. 처음으로 다시 나올 일정, 다음 단계가 정해지지 않은 채 한국에 들어간다. 하다못해 COVID-19 팬데믹으로 국경이 봉쇄될 때,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급히 들어올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진행하던 인턴십은 원격으로 계속했고, 갓 졸업했던 대학원의 교수님도 한국 들어왔으면 같이 일하자면서 연락을 주셨으니, 미래가 보장되지 않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나올지, 어디서 어떤 자리를 찾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정도로 계획이 없는 건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는 시간 만에 처음으로 겪는, 낯선 경험이다. 물론 긴 휴가 - 짧게는 몇 주, 길게는 한 달 반 정도까지 - 를 가지는 건 종종 있어 익숙했다. 아무래도 해외 파견 때 휴가를 모아두다 한국 와서 크게 쓰는 경험이 많기도 했고, 다음 채용이 결정된 후에도 잠시 쉬겠다며 시작 시기를 조금 늦춘 경우도 있었으니 한 달 정도 쉰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뒤에 있다. 여태 가졌던 휴식은 모두 다음 일정이 정해진 뒤에 마음을 놓고 한 것인데 이번엔 그러질 못한다. 당장 며칠이야 좀 쉬겠지만 그 뒤에는 항상 취직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머리를 들이밀 것이다. 말이 휴식이지 구직하고, 이력서와 자소서를 가다듬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라고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올해 초, 아니 작년 말부터 다음 자리에 대해 고민하고 지원을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내 경력보다 상향해서 지원한 곳도 있었고, 정말 가보고 싶었던 나라, 가보고 싶었던 기관, 또 가물에 콩 나듯 나오는 내 이력에 딱 맞는 (다고 생각했던) 크고 작은 자리들에 지원했고 계약 마감에 닥쳐서는 요구사항이 내 경력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일단 지원했다. 다 합해서 못해도 50개 정도 자리에 지원했는데 지난 반년간 서류전형을 통과한 곳은 딱 하나. 그마저도 면접에서 탈락해 결국 계약종료가 다가오는 오늘까지 확정된 자리는 하나도 없다.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 뭘 해야 할까. 필리핀 삶을 정리하면서 결정한 게 딱 하나 있다. 일단 좀 쉬자고. 생각해 보면 필리핀 2년 생활 (그리고 그 안의 키리바시 생활 반년), 그리고 이전의 직장들을 다니며 한 번도 오롯이 쉬어본 적이 없다. 휴가 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회의에 참석했고, 직장과 직장 사이의 짧은 공백기에는 번역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을 채웠다. 필리핀 오기 전에는 드디어 실업급여를 받아보나 했지만 이마저도 받기 전에 새 일을 시작했으니 나름 지난 10년 참 열심히 살았지 싶다. 자의적으로 선택한 건 아니지만 휴가를 받게됐으니 이제 몇 개월 정도는 아무 생각 안 하고 쉬어도 되겠지.
다른 자리로 바로 옮겨갈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이전 직장의 상사분께서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는데, 새로 들어가는 사업이 있는데 이 자리의 FM을 해 볼 생각이 있냐고 하셨다. 고민이 많이 됐다. 승낙한다면 앞으로 몇 년간은 꽤 안정적인 직장에서 나쁘지 않은 월급 (이 업계에선 높은 축에 속하는)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었고, 업무 내용도 내 인풋이 아주 많지는 않아 솔직히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견되는 국가와 지역도 편의성과 접근성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았고, 한국에서 KOICA 사업을 계속하고 싶다면 경력을 쌓는다는 면에서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거절했다. 과거의 인연을 통해 나한테까지 기회가 돌아온, 사실은 과분한 자리라는 건 분명 알고 있었다. 이번에 거절하면 다시 이런 기회가 돌아오는 것은 아주 먼 나중이 되리라는 것도. 너무나도 좋은 기회, 좋은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내가 막연히 분쟁지역 업무를 하고 싶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고, 둘째는 이 사업을 끝까지 맡아서 하면 내 나이가 마흔 가까이 되는데 (아니 어느새…) 그 나이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던가, 생각을 해 봤을 때 답이 너무 확실하게 ‘아니오’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쉬기로 했다. 햇수로 12년째 일을 하면서 당장 다음 사업, 다음 자리를 쫓기 바빴던 관성을 한번 깨고, 내 자리에서 한숨 쉬고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곧 불혹을 앞둔 나이에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 와중에 몇 년째 밀린 병원 일정도 해치우고 (이건 아마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못 만난 지 한참 된 친구들도 만나고. 교수님도…만나야겠지. KOICA 사업 조사도 평소 인연이 없던 국가들로 한번 가보고 싶다. 지난 몇년간 없던 한국에 머물 시간이 일단 많이 주어졌으니, 지금 이렇게 쉬게 됨을 불안함이 아닌, 너무 필요한 때에 얻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기로 했다. 자, 이제 좀 쉬자.
…라고 앞은 모르지만 일단 쉬면서 재정비하자…정도의 내용으로 짧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참 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더라.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은 7월 20일. 한국에 도착한 지 벌써 일주일이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마냥 쉰 한 주였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나름 마음의 정리를 잘하고 짐을 싸고 있었는데 귀국 며칠 전 회사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 가서 한 달 정도 쉬고 다시 와서 조금 더 같이 일해달라고 하더라. 아니 이러면 내가 마음의 정리를 한 건 뭐가 되는 건데. 집도 빼고 송별회도 다 했는데 이제 와서 짜자잔! 나 사실 다시 왔어! 하면 참 재밌는 상황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