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쓰지 않았는데 장마가 끝났다. - 두 번째

나는 늘 꿈의 근사치를 이룬다. 이게 어떤 말이냐면 독일에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다거나, 입법기관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국회의사당역을 오가는 직장인이 되었다는 거다. 꿈을 크게 가지면 깨진 조각도 크다고 누가 그러던데, 나에게는 부스러기만 남았다.

자꾸만 올라가고 싶었다. 유학을 가고 싶었던 것도, 정치에 기웃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존에 내던져진 후에는 대기업에 가야 했고, 그렇지 못하다면 거대 조직이라도 가야 했다. 떠오르는 해를 붙잡아 둥실 오르고 싶었다. 그래야 이 마음이 겨우 채워질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실은 녹록지 않아,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오르지 못한 곳들과 내려놓지 못한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부스러기만 만지작거리는 날이 많아진다. 목이 뻐근해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나는 ‘사회적인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존재하는 나’를 올려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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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라다크에 왔다. 히말라야 중턱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 5,000미터 위에서도 물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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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에 도착하니 검은 깃발이 온통 가득했다. 아슈라를 준비 중이었다. 아슈라는 이슬람교 시아파의 애도 행사로 순교자 이맘 후세인을 기리기 위함인데, 레에서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가슴을 두드리고 쇠사슬이나 칼로 자해를 한다. 지레 겁먹은 나는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도는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곳이다. 이곳도 인도라는 걸 잠시 잊은 게 분명하다. 나는 밥을 먹으러 나온 것뿐인데 눈앞에는 아슈라가 펼쳐져 있다. 검은 깃발과 자해, 피 무시무시한 단어들과는 다르게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었다. 경찰과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고 시내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두근대는 가슴을 붙잡고 내 인생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아슈라를 눈에 담다가 찰찰 쇳소리에 줄행랑을 쳤다.

해가 내려앉고서야 다시 시내에 나왔다. 피를 닦은 거즈 몇 점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라다크는 무슬림만 사는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곳이다. 시아파가 아닌 이들은 행사 중 상점의 문을 닫고, 시아파는 행사가 끝나면 거리를 깨끗이 청소한다. 종교 인종 문화가 얽히고설킨 이곳이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인가 보다. 라다크에서는 나의 신과 너의 신을 위해 기도하는구나.

*레: 라다크의 가장 큰 도시

*레: 라다크의 가장 큰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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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자이기에 기꺼이 여행자스러움을 감수한다. 그렇지 않아도 고도가 높은 레인데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판공초에 간다. 판공초는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호수다. 판공초에 가려면 굽이치는 히말라야산맥을 따라 8시간을 달려야 한다. 히말라야산맥에 누가 도로를 만드냐면 사람이 만든다. 한여름에 패딩을 입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곡괭이질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두 발짝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는데 말이다. 나는 이들이 무수히 삼킨 숨 위를 달린다. 오전에 출발한 우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판공초에 도착했다. 판공초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온갖 수식어를 들춰보아도 마땅한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몇 자 적어 보자면 나는 정말이지 이곳의 불행마저 끌어안고 싶다.

궁금한 사람들에게: 판공초의 물은 짜다.

궁금한 사람들에게: 판공초의 물은 짜다.

인간은 늘 자연을 정복하려 한다. 인간의 욕심이라면 충분히 물길을 막고, 마멋을 내쫓아 산을 뚫어 짧은 길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8시간이 걸릴지언정 감히 자연에 맞서지 않는다. 어쩌면 그곳에 사는 작은 것들을 지키고 싶을 수도 있을 테다. 어디를 향하든 그것은 사랑과 연민일지니 그 마음이 모인 곳에 악의가 더해지지 않길, 외람히 나 또한 당신들을 닮을 수 있길 나의 신과 당신의 신에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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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여름에 수많은 나를 두고 왔다.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제각기 삶을 살아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는 타시 앙모와 시린 여름과 숨 쉬는 작은 것들을 추억한다. 언제든 히말라야를, 고산을, 두고 온 나를 찾아 헤매리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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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짙은 여름을 함께해 준 이들에게 오래도록 닳지 않던 마음과 감정을 담아, 타시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