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대학에 다니지 않던 나는 레스토랑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평소 요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영화에서나 보던 요리사 모자를 쓰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본적인 칼질부터 시작해서 야채 손질, 조미료 계량은 물론 식자재 납품 관리까지. 하나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란 단순히 불판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퇴근 후 친구들과 맥주 한잔할 때면 대학생 친구들이 오늘 무엇을 배웠는지 떠드는 동안 나는 내가 뭘 만들었는지 말하며 끼어들고는 했다. 그런 나에게 한 친구가 말했다. “넌 좋겠다, 넌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잖아.”

10년 전 레스토랑에서 배운 요리 실력이 개도국 파견 생활에서 생존 전략으로만 사용되던 나의 개발협력 주니어 시절. 처음 발을 디딘 개발 현장에서 사업 계획서에 쓰여진 대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느낌에 휩싸였다. 일정대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모니터링을 하면, 그들의 소득이 개선되어 삶의 질이 개선되고 최종적으로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 구축된다고? 양파 껍질을 벗기고 우유를 80도로 데웠을 뿐인데 야채가 이븐하게 익은 ‘양의 심장과 야생 버섯을 곁들인 피스타치오 양갈비’가 완성될 거라는 말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한 선배님이 나에게 말했다. “개발새발아, 네가 지금 앞마당을 빗질하고 있더라도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거라.” 나는 순간 울컥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말했다. “그냥 로봇청소기 돌리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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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과일을 깎는 과도, 고기의 뼈를 제거할 때 쓰는 본잉 나이프, 중국 요리에서 사용되는 중식도, 빵을 자르는 빵칼, 무엇이든 자르는 장미칼. 물론 중식도로 과일을 깎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걸로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자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위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장인이 아니니까 도구를 가려 써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마당을 쓰는 일에는 빗자루가 제격이다. 특히 솔이 빳빳한 빗자루일수록 거친 표면을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다. 쓸어도 쓸어도 계속 흩날리는 먼지 때문에 말끔하게 청소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도 앞마당에 모래 한 톨 없이 청소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내 손에 쥐어져야 하는 도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안방을 서성거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에게 개발협력 NGO 활동이란 그런 의미라는 답을 내린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비록 요리만큼 과정이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다룰 수 있는 도구가 무엇이고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비록 빗자루로는 로봇청소기처럼 정교하고 세밀하게 물광이 나도록 삐까번쩍하게 청소할 수는 없지만, 집으로 향하는 첫 번째 길목을 빗질하여 사람들을 거실로 이끌 수 있다. 아무리 내가 빗자루 질을 잘 한다고 해서 이런 나를 안방으로 초대할 일은 없겠지만, 애초에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마당을 쓰는 동안 누구는 집안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누군가는 창틀을 닦는다. 국제기구가 방향성을 정하고, 정부는 정책을 수립하고, 대학과 연구소가 해결책을 고민하면서, NGO는 현장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누구는 안방에 있을 수 있고, 누구는 부엌에 있을 수 있듯이 나는 마당에 있는 것뿐이다. 만약에 내가 마당이 덥고 먼지 날린다는 이유로 안방에 가고 싶어했다면,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어떤 조리도구로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올해로 12년차를 맞이한 나의 개발 NGO 활동에는 여러 난관이 있었고, 그런 만큼 고민도 많았다. 연봉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기관 인지도가 높지 않다는 장벽도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그렇다고 나는 지금 나의 이력이 안방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한국 개발협력의 종착지가 KOICA인 것도 아니고, 모두 집 안에 들어오려고 하면 소는 누가 키우나? 아무도 마당을 쓸지 않는다면 집으로 가는 길목은 쓰레기로 뒤덮여 있을 것이고, 아무리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도 창문만 열면 금세 흙먼지가 들어올 것이다. 개발 NGO는 그걸 해내고 있는 중이다.

원해서든 아니든, 함께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는 모든 NGO 활동가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개발협력판에 NGO로 입문을 한 분들에게도 작은 위로를 보낸다. 그래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앞마당에서는 로봇청소기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을.